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이 우릴 이끌었고
이제니
안개 속을 방황하는 이에게
(2015년 믿음사 블로그에서 진행되었던 주문제작 시 일부로 이제니의 2019년 출간된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 다시 쓰여졌다.)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다. 공허를 채우는 잔향을 따라간다. 끝없이 반복되는 잔상이 있다. 아름다운 것들을 회수하여 보관한다. 거울을 마주 보고 정면을 응시한다. 바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있다. 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의 한가운데에 도착합니다. 모르는 것을 어둠이라 부르면서 희미하게 나아갑니다. 시간은 소리 없이 나이테에 새겨진다. 그림자 위에 또 다른 그림자를 덧씌운다. 기쁨보다 선명한 슬픔이 있다. 사람은 모두 내면의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든 선을 넘을 준비가 되어 있다. 흔들리는 피사체들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미래를 두드리면서 과거를 만진다. 빛 없이 죽어 있는 얼굴이 도처에 가득하다.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이 빛은 무엇인가. 꿈꾸던 얼굴을 갖고 싶어 거짓말의 형식을 차용한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묻고 무엇을 춤춥니까. 그림자는 빛의 농도에 의해 질감과 명암을 달리한다. 숨겨 두었던 말을 꺼낸 이유는 경계선을 건너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신경증을 다스리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던 방어기제를 밝혀낸다. 당신의 내면은 열려 있습니까 닫혀 있습니까. 타인의 좋은 패를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은 오래전 꽃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을 울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떨리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달리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백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가능성으로 무한히 출렁입니다. 왜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 요구 받은 대답을 다듬어 질문으로 돌려준다.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의 간극은 무감했던 날들을 반추한다. 과장된 음역을 흡수해서 균형감 있게 배치한다. 왜곡을 발생시키는 요소를 삭제한다. 별들이 빛납니다. 구름이 흐릅니다. 바람이 흩날립니다. 때로는 개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자신을 태우면서 빛을 내는 것이 있다. 순간순간 기억을 흘려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슬픔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열어보는 서랍이 있다. 버리고 싶은 오래된 습관이 있다. 사람은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가. 시간은 어떻게 두려움을 조작하는가. 남들과 똑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에 어떤 즐거움이 있습니까. 누구도 아무도 어디로 가라고 일러주지 않습니다. 고유한 목소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다양한 형태와 질감에 다가가야 합니다. 분산하고 발산하는 빛을 상상 속에서 재현한다. 더 깊은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아도 좋습니다. 더 깊은 어둠 속에서 더 깊은 바닥으로 헤매어도 좋습니다. 죽어가는 방식으로 피어나는 꽃을 건네준다. 잠재된 감정의 잠정적인 속삭임을 주시한다. 떠오르기를 기다려 만나게 되는 장면은 오래전 어머니의 뒷모습이다. 한 발 한 발 하루하루씩 살아가라고 말하며 응답을 기다리는 내면의 목소리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기로 합니다.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들의 역사는 회고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상의 그림자로부터 대상을 분리한다.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떠맡은 역할로부터 벗어난다. 무관한 단어들 속에서 사물의 이름과 존재의 환영이 자리를 뒤바꾼다. 자리 없는 마음 대신 피어 있는 꽃을 만진다. 낯선 목소리 사이로 피어나는 얼굴이 있다. 어둠의 경계 너머로 스며드는 기억이 있다. 가볍지만 쉽게 찢어지지 않고 복원력이 뛰어납니다. 닫혀 있던 선분이 열리고 있다. 경계 없는 목소리로 분명한 질문을 던진다.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여기에 있습니까. 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의 한가운데에 도착합니다. 모르는 것을 어둠이라 부르면서 희미하게 나아갑니다. 제자리걸음이어도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 문장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마지막 문장은 날개로 펼쳐진다. 미래를 두드리면서 과거를 만든다. 세계의 입구가 열리고 있다. 숨소리 뒤에 들려오는 아름다움이 있다.